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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5월 선비의 편지

  • 작성일 2020.04.27
  • 조회수361
온라인 소식지 2020년 5월 선비의 편지
이달의 선비(2020년 5월) - 방촌?村 황희黃喜(1363~1452)                           Bangchon Hwang Hui   황희黃喜(1363~1452)는 조선시대 초기에 활동한 정치가입니다. 영의정 18년, 우의정 1년, 좌의정 5년을 역임하며 도합 24년 동안 정승을 지냈습니다. 그는 세종世宗(재위 1418~1450)과 함께 태평성대를 이끌었고,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명재상이었습니다.  황희의 본관은 장수長水이고, 자는 구부懼夫, 호는 방촌?村입니다. 그는 개성에서 출생하여 1376년(우왕 2)부터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1389년(공양왕 1)에는 문과 대과에 급제하였고, 이후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습니다.    황희는 고려와 조선의 교체 시기에 걸쳐 87세에 이르는 나이까지 70여 년간 관료 생활을 하는 동안 다양한 정책을 펼쳤습니다.  전국 각 도에 명하여 뽕나무를 심게 해서 백성의 의복을 풍족하게 하였습니다. 또한 《경제육전經濟六典》 등 다양한 서적을 편찬하였고, 국방에서도 북방의 야인과 남쪽의 왜에 철저히 대비하였습니다. 그리고 노비 신분으로 첩이 된 여성의 자식에게 노비 신분이 세습되는 것을 면제하는 정책도 실시하였습니다.  원칙과 소신을 견지하였던 명재상 황희의 삶은 지금도 많은 이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황희는 관대하고 후덕하며 침착하고 신중하여 재상宰相의 식견과 도량이 있었으며, 후덕한 자질이 크고 훌륭하며 총명이 남보다 뛰어났다. 집을 다스림에는 검소하고, 기쁨과 노여움을 안색에 나타내지 않으며, 일을 의논할 적엔 정대正大하여 대체大體를 보존하기에 힘쓰고 번거롭게 변경하는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였다. (중략) 재상이 된 지 24년 동안에 중앙과 지방에서 우러러 바라보면서 모두 말하기를, ‘어진 재상宰相’이라 하였다.” - <문종실록文宗實錄>에 수록된 황희의 졸기卒記
[글씨로 보는 선비의 향기] 강과 바다는 개울물도 마다하지 않아 그 거대함을 이루어 냈다. 河海不擇細流하해불택세류 故能成其大고능성기대    석전石田 황욱黃旭(1898~1993)이 쓴 글씨입니다. ‘河海不擇細流하해불택세류 故能成其大고능성기대 石田老人석전노인’이라 적혀 있습니다. 이 말의 뜻은 강과 바다는 하찮게 작은 물줄기도 마다하지 않고 받아 그 거대함을 이루어 냈다.”라는 의미입니다. 이 말의 어원은 중국의 역사가인 사마천司馬遷(BC 145?~BC 86?)의 역사서인 《사기史記》 가운데 <이사열전李斯列傳>의 ‘간축객서諫逐客書’ 문장에 실려 있습니다. 이사李斯(?~BC 208)는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의 승상으로 분서갱유 등 강력한 법치사상을 이끈 정치가입니다. 본문에는 두 줄의 문장이 대구를 이루고 있습니다.  태산은 한 줌의 흙덩이를 사양하지 않아 거대함을 이루었고, 하해는 개울물도 마다하지 않아 그 깊음을 이루었다. 泰山不辭土壤태산불사토양 故能成其大고능성기대 河海不擇細流하해불택세류 故能就其深고능취기심   당시 진나라에서는 타국 출신의 관리를 추방하자는 여론이 높았지만, 타국 출신인 이사는 이에 반대하는 논조를 담은 명문장 <간축객서諫逐客書>를 올리며 모든 인재를 고루 등용해야 천하통일의 대업을 이룰 수 있음을 비유적으로 설명하였습니다. 오늘날 이 말은 사람을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을 끌어안고 가야 큰일을 이룰 수 있다는 교훈으로 종종 인용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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