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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미술실 내부 사진
Fine Arts Gallery미술실
미술실에는 전라북도 지역에서 출토되거나 제작된 불교미술품과 도자기, 목칠기, 한지공예품을 전시하고 있다. 크게 ‘전북의 불교문화’, ‘전북의 도자문화’, ‘목공예와 한지공예’의 세 주제로 구분하여 소개하고 있는데, 보물 제1325호인 전 낙수정 출토 범종을 비롯하여 다양한 전북지역의 불교미술을 감상할 수 있다. 특히 고려청자의 대표적 생산지인 부안 유천리와 초기 청자 가마로 알려진 진안 도통리 가마 출토품, 조선시대 대표적인 분청사기 가마인 고창 용산리 출토품 등이 전시되고 있어 전북의 도자문화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또한 조선시대 전주의 한 면을 엿볼 수 있는 한지공예품을 통해 전북지역 사람들의 발자취를 함께 느낄 수 있다.
미술실
미술실 내부 배치도

전북의 불교문화

  • 202금동보살상
  • 204전 남원 출토 금동사리기, 천부상
  • 205향완
  • 206전 낙수정 출토 범종
  • 207쇠북
  • 208용부늬대야

전북의 도자문화

  • 209청자편
  • 210청자 꽃모양접시
  • 211청자 고리무늬의자
  • 212청자 참외모양 주전자·청자 잔과 받침
  • 213청자편
  • 214고려백자편
  • 215청자 잔과 받침
  • 216청자 국화무늬 접시
  • 217청자 포도무늬 주전자
  • 218청자 용무늬 매병
  • 219분청사기 물고기 무늬 항아리

목공예와 한지공예

  • 220경상
  • 221태국무늬부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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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를 위한 공덕

전시실 소개

불교는 기원전 6세기 무렵, 인도에서 왕자로 태어나 깨달음을 얻은 고타마 싯다르타 즉 석가모니의 가르침에서 시작한 종교이다. 불교를 널리 알리고 석가모니를 비롯한 불교의 여러 신을 찬미하기 위해 제작된 회화, 조각, 건축, 공예품을 통틀어 불교미술이라고 일컫는다. 불교가 인도에서 시작된 만큼 불교미술 역시 인도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나 불교가 전래된 각 나라마다 지역마다 시기에 따라 새로운 불교미술품이 만들어졌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불교미술품은 곧바로 예배의 대상이 되거나 예불을 위한 도구가 되었던 만큼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극진한 정성으로 시대정신을 오롯이 담아냈다.

김제 대목리 출토 판불
1980년 3월 7일 김제시 성덕면 대목리 탄상마을에 거주하는 주민이 집 근처 자신의 밭(대목리 산29번지)에 비닐하우스를 설치하던 중 불상이 새겨진 작은 동판 4개를 발견했다. 이 소식은 순식간에 세간의 화제가 됐다.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백제의 수도였던 부여, 익산 등지에서만 확인되던 백제의 불상이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곳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발견된 4점의 크기나 조각은 제각각이다. 그 가운데 가장 큰 동판(7.3×7.8cm)에는 화려한 장막 아래 부처와 꽃을 든 두 구의 보살을 새겼다. 두 번째로 큰 것(6.8×6.8cm)에는 반가사유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자연스러운 자세를 취한 나한상을 조각했다. 세 번째로 큰 것(8.8×5.0cm)에는 감실 안 나한상을 상하 7구씩 총 14구를 조각했으며, 가장 작은 것(3.5×6.1cm)에는 감실 안에서 선정하고 있는 부처를 새겼다. 이 조각상들은 서산 마애삼존불, 경주 남산 삼화령 미륵삼존불 등 삼국시대 7세기 중엽 불상과 유사한 면모를 보이는 것으로 보아 대체로 650년 무렵에 백제에서 만든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의식이나 예배의 대상으로는 작은 이 판불을 어떻게 사용됐을까. 한 편에서는 큰 판에 부착하여 벽면을 장식됐을 것으로 여겨졌고, 또 다른 편에서는 가장 큰 판불에 달려있는 네 개의 다리와 판불 가장자리가 움푹 들어가 있는 점을 근거로 얇은 판을 두드려 만드는 압출불(壓出佛)을 만들 때 썼던 틀로 보기도 했다. 그런데 최근 표면에 대한 성분 분석 결과 금(Au) 성분이 나와 압출불의 틀이 아닐 것이라는 의견이 제기됐다. 그러나 사찰에서 개금불사가 발견되는 데다 도금은 후대에도 할 수 있기 때문에 압출불의 틀이 아니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이 판불이 발견될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백제의 불상은 부여, 공주, 익산 등 중요한 도시와 백제에서 중국으로 가는 중요한 교통로 예산, 서산, 태안 등에만 발견됐다. 이 판불이 출토된 김제시 성덕면 대목리가 백제에서 중요했던 곳이라는 짐작이 가능한 대목이다. 판불이 발견된 2년 뒤 정읍시 소성면 보화리에서도 백제 석불 2구가 발견됐는데, 백제의 중방성으로 여겨지는 고부와 매우 가까운 곳이다. 김제 대목리 출토 판불과 정읍 보화리 석불입상은 백제가 중국으로 가는 교통로뿐만 아니라 중요한 남방 교통로를 뜻한다 하겠다.
전 낙수정 출토 범종(보물 제1325호)
1999년 7월 다카하라 히미꼬(高原 日美子)라는 여인이 일본 후쿠오카현청교육위원회를 방문하여 한국 종 1구를 기증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위원회는 여사에게 원 소유국의 문화기관에 기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는 조언을 하였고, 고심 끝에 여사는 같은 해 10월 한국 국립문화재연구소에 기증할 것을 약속했다. 같은 해 11월 5일 동종은 한국으로 돌아왔는데, 고향을 떠난 뒤 실로 73년 만에 그리운 고국 땅을 밟은 것이었다. 이 동종은 2001년 9월 21일 보물 제1325호로 지정되었고, 이후 국립전주박물관으로 이관되었다.
이 동종이 국립전주박물관의 소장품이 된 이유는 일제강점기 3대 조선총독인 사이또 마코토(齊藤實)가 1926년 일본 수성원(水城院)에 동종을 기증하면서 보낸 편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사이또의 편지에 따르면 동종은 당시 전주면(全州面)에 살던 박모(朴某)가 자신 소유 낙수정(樂壽亭) 수리 시 땅 속에서 발견한 것으로써, 1916년 경성(京城)에서 열린 공진회(共進會)에 출품하기도 하였다. 동종의 원소재지가 전주였던 것이다.
한편 동종이 발견된 곳에서 1909년에 '開元寺'(개원사)가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이 동종은 전주 개원사라는 절에 걸려있던 종으로 어느 때인지 모르지만 종을 매다는 부분이 깨어지자 땅속에 묻혔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후 개원사는 폐사되고 조선시대 낙수정이라는 정자가 들어섰을 것으로 생각된다.
전 낙수정 동종은 통일신라 동종을 연상시키면서도 고려 초 동종의 세부 표현과 유사한 것으로 미루어 10세기 중엽에서 11세기 전반에 조성하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런데 이 동종과 흡사한 종이 일본 원청사(圓淸寺)에도 있다. 이 두 종은 크기는 물론이고 넝쿨무늬·비천 등의 모습까지도 유사하여 같은 장인(匠人)이 동일한 문양판(文樣板)을 사용하여 조성한 것으로 추측된다. 불가(佛家)에서 동종의 소리는 '일승지원음(一乘之圓音)', 즉 '부처의 소리'를 의미한다. 또 종을 매다는 부분의 대나무 관과 같은 음통은 모든 소원을 들어준다는 신라의 보물 만파식적(萬波息笛)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한다. 천년 전 옛 전주 사람들에게 마음의 평안을 주고 소원을 들어주었을 이 동종의 소리는 지금도 국립전주박물관 전시실에서 울려 퍼지고 있다.
원수리 출토 순금제 불상(10대 유물)
이 순금불상은 1963년 8월 6일 익산시 여산면 원수리에 살던 농부가 밭을 갈다가 발견하였다. 이 순금불상이 발견된 장소는 마을사람 사이에서 이미 독적골 절터로 알려졌던 곳이었다. 그런데 관람객이 가장 사랑하는 이 순금불상이 금은방에 팔려 금반지가 될 뻔한 적이 있다. 바로 이 불상을 발견한 사람이 충남 논산의 한 금은방에 팔러갔다가 금값으로 여섯 돈을 쳐주겠다는데 실망하고 돌아서는 찰나 순경이 이를 발견하여 현재 우리에게 전달된 것이다.
깨달음을 얻은 존재인 부처의 모습은 불교경전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몸에서 황금빛이 난다는 내용이 있다. 경전의 내용을 충실히 따르려면 황금으로 만들면 될 것이다. 그런데 삼국시대 이래 수많은 불상 가운데 순금으로 만든 불상은 경주 구황동 삼층석탑에서 출토된 2구와 익산 원수리 출토 순금제 불상 1구 등 3구밖에 없다. 지금도 그렇지만 예부터 황금은 매우 귀하고 비싼 보석이라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불상은 철이나 동과 같은 금속, 나무, 흙, 돌로 만들었으며, 황금빛을 내기 위해 도금을 하였을 뿐이다.
불상은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을 때 취했다는 항마촉지인을 맺고 있는 것으로 보아 석가모니불상임을 알 수 있다. 특히 역삼각형 얼굴, 오른쪽 어깨 위를 살짝 걸친 옷자락, 대좌 등의 형태는 중국 원대 성행하였던 네팔과 티베트의 불교인 라마교의 불상과 유사하다.
불상의 뒷면에 '男 善 人 辛丑正月日 金○○'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이로써 신축년 1월에 김모라는 사람이 발원한 불상임을 알 수 있다. 이 불상에서 네팔과 티베트 불상의 영향이 두드러진 것으로 미루어 보아 신축년은 1361년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한편 상단에는 고리가 하나 달려 있는데, 여기에 줄을 꿰어 마치 목걸이처럼 몸에 지니고 다녔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늘과 바다를 품은 그릇

전시실 소개

도자기는 흙, 불, 그리고 만드는 사람이 혼연일체가 되었을 때 결실을 맺는 예술이다. 그만큼 기술과 예술성이 바탕이 되지 않고는 좀처럼 만들 수 없었다. 1,000여 년 전만 하더라도 도자기를 만들 수 있는 나라는 중국과 고려 밖에 없었다. 우리나라에서 자기 제작은 9세기 말에서 10세기 초에 통일신라 경질硬質 토기의 기반 위에 중국 저장성浙江省 월주요越州窯로부터 유입된 청자 제작 기술의 영향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불과 200여 년 만에 부안과 강진에서 중국인들이 놀랄 정도로 빼어난 경지에 이른 청자를 생산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고려시대 절정에 달한 청자 대신 분청사기와 백자가 그 자리를 대체하였다.

유천리 출토 청자
고려청자를 보고 고려의 문인 이규보(李奎報·1168~1241)는 그의 시에서 "푸른 자기 술잔을 만든 솜씨는 하늘의 조화를 빌려왔나 보구려"라고 하였고, 중국 송나라 문신인 서긍(徐兢)은 '선화봉사고려도경'에서 "도기의 색이 푸른 것을 고려인들은 비색이라고 하며, 근래에 들어 제작이 공교해지고 광택이 더욱 아름다워졌다."라고 하였으며, 중국 송나라의 태평노인은 "고려의 비색자기는 천하에서 제일"이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이러한 고려청자의 주요 생산지가 바로 바로 전북이다. 줄포만에 인접한 고창 용계리와 반암리, 부안 진서리와 유천리는 전남 강진만의 용운리, 계율리, 사당리와 함께 양질의 고려청자가 만들어졌던 곳이다. 부안 일대의 청자요지에서는 음각, 양각, 투각, 상감, 철화, 퇴화, 철채 등 다채로운 기법으로, 구름과 학, 파도와 물고기, 국화, 모란, 연화, 넝쿨무늬, 포류수금 등 다양한 무늬를 새긴 청자를 만들었다. 주된 형태는 대접, 발, 접시, 잔과 잔받침, 병, 매병, 의자, 향로, 장구, 주자 등이 있다. 진서리에서는 양질의 청자 외에도 약간 질이 떨어지는 일상 용기들이 주로 생산된 반면, 부안 유천리 요지에서는 양질의 세련된 청자가 생산되었다. 양질의 유천리 청자는 왕실에도 납품되었는데, 고려 명종(재위 1170~1202)의 지릉에서 출토된 청자와 유천리 청자가 유사한 점이나 유천리 특유의 흑백퇴화문 청자접시가 희종(재위 1204~1211) 석릉에서 출토된 점, 고려 국왕의 행궁으로 추정되는 파주 혜음원(1122년 창건) 유적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부안 유천리 요지에서는 70~90cm에 달하는 대형의 매병이 출토되기도 하였는데, 국립전주박물관에 전시 중인 매병 두 점은 거기에 미치지 못하지만 손에 꼽을 수 있는 대형 매병이다. 매병은 아가리가 좁고 짧으며, 어깨는 넓고 밑이 갸름한 형태의 병이다. 표면은 상감기법으로 모란과 용무늬를 아름답게 장식하였다. 특히 모란무늬로 장식된 매병은 일제강점기 현재 전주초등학교에서 발견된 것으로 그 의미가 더욱 깊다.

나무와 종이의 향기

전시실 소개

주위의 흔한 나무나 강하고 질긴 한지를 이용하여 가구, 문방구, 의식주에 필요한 물건 등을 만드는 목칠공예와 한지공예는 백성들과 가장 친숙했던 공예품이었다. 우리나라의 목칠공예품은 단순하고 소박하면서도 높은 품격을 지녔다. 한지공예품은 비록 조선후기 이후 본격적으로 만들어졌지만, 만들기 쉽고 변형이 자유로웠기 때문에 개성 넘치는 것들이 많다. 이처럼 나무와 종이는 쉽게 구하고 만들기 쉬웠던 점도 있지만, 목칠공예품과 한지공예품은 손길이 닿을수록 자연스러움을 더해져 사람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목칠공예
한반도는 사계절이 뚜렷하여 나뭇결이 빼어나며 수목의 식생도 풍부하여, 장롱 같은 큰 가구에서 빗접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수준 높은 목칠공예품이 제작되었다. 목가구는 간결하고 절제된 느낌을 주는 반면, 나전칠기螺鈿漆器나 화각華角공예품은 장식이 강조되어 또 다른 면모를 보인다.
한지공예
한지를 오려 붙이거나 꼬아 일상생활에 필요한 작은 것들을 만든 한지공예품은 가볍고 만들기 쉬워 많은 각광을 받았다. 한지공예는 목칠공예와 달리 한지 공급이 활발해진 조선후기 이후에 활발히 제작되었다.
바람을 일으키는 나무와 종이, 부채
“여름 생색은 부채요, 겨울 생색은 달력”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부채는 무더운 여름 나기의 필수품이었다. 일부 새의 깃털로 만든 일부의 것을 제외하면, 부채는 대부분 나무로 만든 부챗살 위에 종이를 발라 붙였으며, 다양한 문양을 오려 붙이거나 그림을 그려넣기도 하였다.
본 공공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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