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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속에서 떠나는 무이산 여행

  • 작성자플랜아이
  • 작성일 2023.03.29
  • 조회수241
그림 속에서 떠나는 무이산 여행<br/>- 채용신필  무이구곡도10폭병풍<br/>채용신 <무이구곡 10폭병풍>, 지본채색, 191.4 x 604.0cm, 국립중앙박물관<br/>석지(石芝) 채용신(蔡龍臣, 1850~1941)은 고종의 어진[초상]을 그렸던 화가였다. 그는 1905년 아버지의 고향 전북으로 내려와 우국지사를 포함하여 지역 사람들을 화폭에 담기 시작한다. 높은 관직과 특별한 계기가 없어도 누구나 초상화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시대의 문을 연 것은 바로 채용신이었다. 그는 조선시대 초상화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사진기술의 도입 등 자신만의 극사실적인 화풍으로 새로운 기법의 초상화를 그려, 많은 사람들이 그림을 주문하기 위해 몰려 들었다고 한다. <br/><br/>그런데, 채용신은 초상화 외에도 산수화, 꽃과 새를 그린 화조화, 옛 이야기를 그린 인물화 등도 그렸다. 1923년에 돌아가진 할아버지 사진을 들고 가서 초상화를 주문 의뢰하는 과정(선금, 영수증 처리 등)을 기록한 글이 있으며, 1940년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광고 전단지에는 채석강도화소에서 초상화, 산수화, 화조화 등을 작품의 크기, 주인공의 복식 등에 따라 차등을 두고 매겨진 가격으로 판매하였던 기록이 남아 있다. 이러한 기록을 통해, 이제 상업적으로 그림을 주문받고 판매하였던 시스템이 초보적으로나마 구축되었던 당시 상황을 알 수 있다. <br/><br/>무이구곡은 중국에서 경치가 빼어나기로 유명했던 복건성 무이산(武夷山)의 아홉굽이를 말한다. 채용신이 그린 <무이구곡도>는 기존의 무이구곡도와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그것은 바로 거울에 비친 것처럼 글씨가 좌우 반전된 채 쓰여졌다는 점이다. 전체 화면에는 지도처럼 각 장소의 명칭을 적었다. 명칭을 적을 때는 흰색으로 사각형을 칠한 다음 붉은 선으로 테두리를 만들었다. 상단의 좌우 반전된 글씨와 달리 제대로 된 방향으로 적었다. 채용신이 나라를 잃은 망국자의 심정을 표현하기 위해 일부러 제시를 거꾸로 쓰는 방법을 선택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으나, 정확한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노란색과 초록색으로 산과 바위를 표현하고, 부분적으로 밝은 파랑색을 가미한 점은 채용신의 전형적인 특징이다.<br/><br/>10폭의 넓은 화면에 연이어서 무이구곡의 풍경을 위에서 내려다본 시점에서 그린 연폭 병풍화이다. 각 폭의 화면 상단에는 1곡(曲)부터 9곡까지 7언 절구의 ‘무이도가(武夷櫂歌)’, 즉 무이구곡을 읊은 시가 적혀 있고 마지막 10폭에는 서시(序詩)를 적었다. 나뭇잎 도장을 두인으로 찍고 시의 마지막에 ‘개국오백이십 사년을묘국월상한석지사(開國五百二十四年乙卯菊月上澣石芝寫)’라고 적었다. 그리고 아래에는 ‘석지(石芝)’라고 판 사각으로 된 붉은색 도장을 찍었고 다시 그 아래에 ‘정산군수채용신신장(定山郡守蔡龍臣信章)’이라고 적힌 큰 도장을 찍었다. 무이산의 기괴한 봉우리가 배치되어 있고, 그림 중앙에는 가로로 길게 아홉 굽이의 계곡물이 흐르는데 각 폭에는 주자를 태운 나룻배가 물길을 따라 뱃놀이를 하는 모습이 보인다. 하단에는 지게를 내려놓고 잠시 쉬고 있는 인물과 소 한 마리가 그려져 있는 등 조선의 농촌 풍경이 담겨져 있기도 하다(제10폭). <br/><br/>성리학을 집대성한 송나라 주희(朱熹, 1130~1200)가 이곳에 머물면서 강론과 저술에 몰두하였다고 하는데, 무이구곡도는 그곳에 직접 가보지 못한 조선시대 문인들이 경치를 간접적으로나마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그들은 무이구곡에 직접 가보지 못한 아쉬움을 무이구곡도를 보면서 달랬다. 금강산을 가보지 못한 이들에게 금강산도가 대리만족의 순간을 선사했던 것처럼. 그들이 무이구곡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조선 후기의 학자 이만부(李萬敷)가 ‘식산집’을 쓴 글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br/><br/>“나는 늦게 태어나서 주자의 문하에 들지도 못하고, 또 지역이 멀다 보니 한 번이라도 그곳에 가서 유풍을 담아 올 수도 없었다. 마침내 스스로 무이도 한 본을 모사하고 주자의 정사기와 잡영, 도가와 무이에 관련된 모든 사실들을 그 아래에 기록하여 때때로 펼쳐보면서 따르지 못한 감회를 맡긴다.”<br/><br/>그림은 마치 그곳에 머물고 있는 것만 같은 경지를 잠시나마 제공한다. 가보지 못했고, 어쩌면 앞으로도 가보지 못할, 그런 곳인 중국 무이산. 조선 문인들은 성리학의 대가 주희를 존숭하는 마음으로 그림 속에서 성지순례를 떠났던 것이다. 학예연구사 민길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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